정간보(井間譜)와 한글 띄어쓰기

장면1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 1863~1949년)는 미국의 감리교회 선교사, 사학자, 7개국어를 구사하는 언어학자, 조선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교육자, 독립신문 발행을 도운 언론인, YMCA 초대회장, 한국어 연구와 보급에 앞장선 한글학자였다. 또한 대한제국 말기 고종을 도와 국권수호 운동을 했으며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독립운동가였다.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성에 매료되어 미국 언론과 영문 잡지에 기고와 논문을 통해 한글과 한국문화를 홍보했고, 한글에 띄어쓰기 도입을 적극 권장하여 오늘날 띄어쓰기가 보편적으로 한글에 도입되도록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또한 한글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주시경 선생과 함께 한글 표기에 띄어쓰기와 쉼표, 마침표 같은 점찍기를 도입하고, 고종에게 건의해 국문 연구소를 만들도록 했다. 이 공을 인정받아 2014년 10월 9일 한글날에 금관 문화훈장을 받게 되어 그의 증손자가 행사에 참석해서 훈장을 대신 받았다. 한글학회에서는 한힌샘 주시경을 위시한 여러 근대 국문학자들 가운데 유일한 외국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장면2 ‘불어(佛語)’는 붙여 쓰는 것이 맞고, ‘프랑스 어’는 띄어 쓰는 것이 맞다고 되어 있습니다. 똑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 한 단어가 됐다가 두 단어가 되기도 합니다. 한국말은 어렵다는 인식을 가져옵니다.” 전직 국립국어원장이 “복잡하기 짝이 없는 현행 띄어쓰기 규정이 국어를 망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2006~2009년 노무현·이명박 두 정부에 걸쳐 국립국어원장을 지낸 이상규 경북대 국문과 교수다. 이 교수는 본지 통화에서 “솔직히 말해서 나도 글을 쓸 때 띄어쓰기가 자신 없다”고 털어놨다. 한자로만 된 ‘동해’ ‘남해’는 붙여 쓰지만, ‘외래어+한자어’ 구성인 ‘카리브 해’ ‘에게 해’는 띄어 쓰게 되어있다. ‘가슴속에 품은 희망’은 ‘가슴속’이지만 ‘총알이 가슴 속에 박혔다’는 ‘가슴 속’이다. ‘가슴속’이란 말은 ‘마음속’과 같은 뜻일 때만 한 단어로 붙여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는 ‘돼지고기’ ‘쇠고기’는 붙여 쓰지만, 올라 있지 않은 ‘멧돼지 고기’ ‘토끼 고기’는 띄어 써야 한다. ‘큰돈’은 붙여 쓰고 ‘작은 돈’은 띄어 써야 한다. 이 교수는 “국민의 불편을 가중시킬 뿐 아니라, 합성어가 단어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조어(造語) 생산력에도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 2013.05.22

장면1과 2에서 한글의 부끄러운 2가지가 동시에 지적된 듯 합니다. 구한말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가 한글을 발견하기 전까지 띄어쓰기도 없이 한글을 사용해 온 조선인들. 세종이 만들어 준 후 단 한번도 국어사전이나 맞춤법 교재 없이 방치되어 있던 한글에게 이제 국립국어원도 생기고 띄어쓰기 규칙도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그 규칙이 시시콜콜 잔소리하는 기숙사감처럼 학생들을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2개의 문제가 아니라, 두 문제를 합치면 0개의 문제가 된다고 봅니다. 헐버트 박사가 세종실록 권145 속 취풍형(醉豊亨)을 볼 기회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선교사들이 찬송가의 음표간격에 맞춰 한글가사를 적듯이, 세종은 12음계를 적고 거기에 맞춰 훈민정음을 띄워 적었습니다. 가사의 중심주파수(center frequency)에 해당하는 12음을 적고, 방점으로 가사의 억양(intonation)을 표기했으며, 세로쓰기 원고지 같은 일정간격의 칸(間)을 나눠 1박자 삼아 비트(bpm)를 형성한거죠.

세종실록 권145 취풍형 악보 두 면 — 정간 속에 율명·장구부호·훈민정음 가사 3겹 트랙
세종실록 권145 취풍형(醉豊亨) 악보 원본스캔

국립국어원장이 “솔직히 말해서 나도 글을 쓸 때 띄어쓰기에 자신 없다”라고 했을 때 그걸 고백이라 여길게 아니라 ”솔까말 찬송가 책을 보면 동일 단어라도 곡마다 띄어쓰기가 다르지만 거기에 통일된 규칙이 왜 없냐고 지적하는 사람은 시가 뭔지 음악이 뭔지 모르는 사람 아닌가?“ 라고 저는 묻고 싶습니다. 훈민정음을 만든 사람은 정간보를 만든 사람이고 music lover입니다. 아이들에게 시와 가사 띄어쓰기에 일관된 법칙을 세우고 그걸 외워서 시험치게 만드는 교육은 하지 말아 달라고. 다만 의무교육 기간동안 한글 맞춤법 등 통일된 철자법을 교육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한글은 대한민국의 문자이며 스펠링이 통일되어야 국민들 각자가 매일 생산하는 글을 검색해서 찾을 때 용이하니까요.

세종실록 권136-권147은 악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박연을 시켜 아악(雅樂)을 정비하고 1정간1박 형식의 정간보라는 유량악보를 만든 세종은 신악(新樂)으로서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을 작곡하였습니다. 세종의 의도는 궁중잔치를 위한 회례악(會禮樂)으로서, 우리 고유의 선율(향악)을 바탕한 음악이 조상에게 바쳐지길 원했으나 세종 당대에는 조정의 보수적인 분위기 때문에 제사에 사용되지는 못하였고, 세종의 아들이 세조가 1464년(세조10년)에 “조상님들이 평소 들으시던 음악을 제사 때 연주하는 것이 옳다”며 보태평과 정대업을 종묘제례악으로 정식 채택했습니다.

– 보태평(11곡): 역대 왕들의 **문덕(文德, 학문과 통치 능력)**을 찬양하는 음악입니다.
희문, 기명, 귀인, 형가, 집녕, 융화, 현미, 용광정명, 중광, 대유, 역성 으로 구성됩니다.
– 정대업(11곡): 역대 왕들의 **무공(武功, 군사적 업적)**을 찬양하는 음악입니다.
소무, 독경, 탁정, 선위, 신정, 분웅, 순응, 총유, 정세, 혁정, 영관 으로 구성됩니다.

율려신서가 12율(12음)의 기반이듯이 봉래의(鳳來儀)가 ‘황종’ 역할을 하면서 12곡이 채워집니다. 곡의 이름은 봉황이고 가사의 이름은 龍이니 황종이자 임금이자 주인공임이 분명합니다. 세종실록의 악보가 권136-권147까지 총12권으로 구성된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천지인 三才의 이치에 따라 봉래의는 ‘용비어천가’라는 동일한 가사내용으로 3가지 버전(여민락, 치화평, 취풍형)이 만들어 집니다.

가사연주길이템포
여민락(與民樂)용비어천가(한문)길다느리고 장중함. 호흡이 길고 성조변화 완만
치화평(致和平)용비어천가(正音)중간중간
취풍형(醉豊亨)용비어천가(正音)짧다빠른 곡, 정간 속의 가사와 음표 매우 조밀

정음으로 인쇄된 서적이나 서간문은 많이 있지만 세종실록 속 ‘취풍형’ 원본스캔을 보는 것은 각별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세종사후에 간행되긴 했으나 세종이 작곡한 악보이니 만큼 세종본인이 훈민정음을 어떻게 적었는지 알 수 있고, 판본체 같은 인쇄용 서체가 아니라 붓으로 쓴 필기체라서 세종이 보내온 편지나 시를 보는 느낌이 듭니다. 사건기록을 위한 문‘서’가 아니라 악‘보’이니 만큼 소리를 생생히 캐치하기 위해 세로쓰기 원고지 같은 井間을 3겹의 track으로 채워넣은 레이아웃이 돋보입니다.

취풍형 악보에서 잘라낸 ㅢ 꼴 여섯 글자 — ㅡ와 ㅣ를 띄워 쓴 자형
세종실록 취풍형 악보에서 잘라낸 ㅢ 자형들 — ㅡ와 ㅣ를 띄워 쓴 훈민정음 필기체

취풍형 font에서 ‘ㅢ’ 형태를 관찰해 봅시다. 현대한글 폰트에서 ㅡㅣ가 한통으로 붙어있는 것과 달리 ‘긔’를 그ㅣ 라고 할 정도로 띄워 썼습니다. 사실 띄어쓰기의 ‘띄’ 발음도 의사의 ‘의’ 발음과 다릅니다. ‘뜨이’를 빠르기 붙여 발음하는 것에 가깝죠.

뜨ㅣ어쓰기 vs 띄어쓰기

사소해 보이지만 이것이 영어 g,d,b를 ㄱㄷㅂ 대신 그 드 브 로 표기하자는 생각에 영감을 주고, 丙辛合에 의해 형성되는 자음조합이 ㄷㅿ·ㅌㅿ → 드ㅿ·트ㅿ 가 될 때 ㅡ를 다른 모음에 어떤 순서로 끼워넣을지 결정할 때 중요한 힌트가 됩니다. (별도후술) 물론 취풍형 속 ‘븨’ 발음이 /bi/라는 뜻은 아닙니다. ㅡㅣ가 한통으로 붙어서 의사의 ‘의’처럼 발음되는 것도 공존하며 ‘븨’는 거기에 해당하죠.

취풍형 속 훈민정음의 자형을 상기하면서 현대정간보에 사용되는 해금/장구의 기호를 들여다보면 한층 더 재미있습니다. 해금 기호속에 ㅡㅣ가 보이고, 장구 기호 속에 ㅇㆍㅣ 가 보입니다. 환각일까요?

해금정악보 66쪽 타령(打令) 정간보 — ㅣ ㅡ 모양의 해금 악상기호가 보인다
해금정악보 66쪽 타령(打令) — 정간 속에 ㅣ ㅡ 모양의 해금 악상기호가 보인다

⦁해금 악상기호 ㅣ ㅡ

ㅣ활대를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당기는 부호이다.
ㅡ활대를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미는 부호이다.
전통악기 해금과 장구 사진
전통악기 해금(왼쪽)과 장구(오른쪽)

⦁장구 악상기호 ㅇ ㅣ ㆍ

장구 부호표 — 덩(떵)·작은 덩·덕(떡)·기덕·궁(쿵)·더러러러·다(더) 기호와 설명
현대 정간보의 장구 악상기호표 — 덩·작은 덩·덕·기덕·궁·더러러러·다(더)

해금의 활대를 왼쪽으로 미는 音과 오른쪽으로 미는 音이 어떻게 다른지 해금연주자가 아닌 저자가 알리 없으니 ai(chatGPT)에게 물어보았는데 그랬더니 더욱 흥미진진해 집니다.

당기는 활 (좌 → 우) ㅣ미는 활 (우 → 좌) ㅡ
집중도 높은 소리, 선명한 중심
어택이 또렷함
강약 강조, 리듬 표현에 유리
👉 말소리처럼 또렷한 소리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확산적인 음색
소리가 살짝 늦게 붙는 느낌 (완만한 어택)
긴 호흡, 이어지는 선율에 유리
👉 노래하듯이 이어지는 소리
酉 (서쪽, 금속, 건조하다, 분리되다) ㅣ 다음 ㅡ 글리프 →ɨ卯 (동쪽, 나무, 습하다, 달라붙다) ㅡ 다음 ㅣ 글리프 →ɰi

장구의 기호에서 ‘작은 덩’, ‘채편을 짧고 약하게 치라는 부호’라는 설명은 마치 schwa을 위해 준비된 표현같네요. 강세없는 음절에서 살짝쿵 짚어만 주는 모음 ə(schwa) = 작은 덩

전통악기 해금의 형태와 활켜는 음색이 세종이 ㅡㅣ 소리맛을 시시콜콜 설명하지 않아도 보여준다면, 장구는 국어학자들이 ㅇ의 소리에 대해 ‘음가 없슴’ vs ‘아니다 울림이 있다’로 싸우는 것에 해답을 줄 것 같습니다. 장구의 형상을 보면 양쪽에 ‘ㅇ’가 붙어있는 통이고. 이것은 스스로 울지는 않으나 발생한 울림을 더 넓고 부드럽게 방사시켜주는 passive radiator입니다. 스스로 울리는 기호는 ㆍ이고, ㆍ옆에 ㅇ가 있으면 그 울림이 한층 더 번져나갑니다. 영어는 aaa라고 적는데, 한글은 왜 ㅏㅏㅏ 대신 아아아 로 적느냐 에 대한 설명이 되고, 한자독음을 적을 때는 종성에 ㅇ를 넣어 표기하여 노래하는 언어로서 유성음 위주인 중국어의 특징을 표현하고, 초등학생 1학년이 국어 시간에 교과서를 읽을때 한자씩 또박또박 읽으라고 선생님이 강요하는 한국어는 종성에 ㅇ를 넣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해가 갑니다. ㅇ는 장구의 울림판이자 피아노의 음향판처럼 한글 모음속에 포함된 ㆍ(타격)에 의해 발생한 진짜 울림을 부드럽게 방사시키는 수동적 울림장치인 것이죠.

원형 정간보 vs 현대 정간보

세종 당시의 원형 정간보는 오늘날 국악에서 사용하는 근대 정간보와는 구성과 표기 방식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현대의 정간보에는 숨표(△), 흘림표, 꺾는표 등 화려한 장식음과 주법기호가 가득한 반면 세종실록의 악보는 단순해 보이는 데, 이는 구전심수(口傳心授)라 하여 동양 전통음악은 악보에 모든 것을 적기보다, 기본적인 골격만 기록하고 세부적인 표현이나 농음(떨림) 등은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직접 전수되는 관습이 강했고, 당시의 궁중 음악은 집단합주 중심이라 개인기량을 뽐내는 산조와 같은 음악이 아니라, 수십 명이 함께 연주하는 합주곡이었습니다. 따라서 세세한 개인적 장식음 기호보다는 정확한 박자와 계음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오늘날 정간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세모꼴(△) 모양의 쉼표를 비롯해, 앞서 예로 든 해금/장구의 악상기호와 꾸밈음 등은 근·현대에 이르러 새롭게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이러한 현대 정간보의 세부 부호들은 국악학자인 대마루 김기수 선생(1917-1986)에 의해 집중적으로 제작되고 체계화 되었습니다. 서양 오선보의 연주 기호에 대응하기 위하여 음을 짧게 끊어내는 ‘끊음표’, 길게 늘여 연주하는 ‘늘임표’, 특정음을 강조하는 ‘특강표’, 그리고 ‘점점 느리게’나 ‘좀 빠르게’ 같은 템포 지시기호들까지 현대 정간보에 고안되어 추가되었습니다. 따라서 현대 정간보는 세종대왕이 창안한 과학적인 시간 분할의 틀(정간)을 기본 바탕으로 하되, 20세기 이후 현대 국악 학자들에 의해 실용적인 연주 및 교육용 부호들이 대폭 덧붙여져 완성된 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 정간보에서 ㅿ를 쉼표에 할당한 것은 전통을 이어가는 적절한 표기라고 생각합니다. 골프에서 par3/par4를 발음할 때, ㅿ가 사라진 한글에서는 파3/파4 라고 적을 것입니다. pa vs par의 발음차이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par는 ‘파’소리 뒤에 짧은 휴지기가 있습니다. 숫자 3,4를 발음하기 전에 짧은 휴식을 갖죠. 모음뒤에 오는 rhotic을 정음이 파ᇫ3/파ᇫ4 로 표기한 곳에서 짧은 휴지기(ㅿ)를 본 것이죠. ‘파ㅿ’에서 ‘파’ 다음칸의 ㅿ가 ⅓을 소리로 채우고 ⅔를 비워두었을 때, 정음은 채워진 ⅓을 종성ㅿ로 표기하고, 김기수의 현대 정간보는 비어있는 ⅔를 쉼표로 간주한 것입니다.

현대 정간보에 사용되는 기호예시

현대 정간보 리듬 표기와 부호·장식음 기호표 — 1井=1박
현대 정간보에 사용되는 기호예시 — 리듬 표기(1井=1박)와 부호·장식음 기호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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